게임기획자가 되고 싶어? (7) 현실적인 기획서를 써라 by storm

상당히 많은 게임기획 지망생들이 '비현실적인 기획서'를 쓴다 (물론 자기자신은 비현실적이란 사실을 느끼지 못하지만).  이런 류의 기획서는 크게 두 가지 유형으로 분류된다. 한 500억은 족히 있어야 완성할 법한 초울트라 슈퍼 블록버스터 스케일의 게임이거나 아니면 도대체 어떤 게임인지 감을 잡을 수 없이 이것저것 뒤섞어 놓은 '잡탕'이거나...

물론 저 두 가지 가운데 한 쪽에 속하는 기획서라고 해도 그 내용이 충실하다면 포트 폴리오로서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거의 대부분의 경우(솔직히 전부라고 말하고 싶지만...) 이런 기획서는 구체적인 기획은 없다. 그저 '이렇게 만들면 대박 난다'라는 근거 없는 주장과 희망사항만 가득할 뿐이다.

내가 최근 몇 년 동안 검토해 본 지망생들의 기획서 가운데 'Worst 5'에 속하는 것 중 하나는, 기획서 초반부터 WoW와 리니지를 열심히 까더니만 자기가 신개념의 MMORPG 시스템을 고안했다면서 도저히 알 수 없는 용어들을 남발하며, 흰색 배경에 오로지(정말 오로지) 검은색 글씨로만 80 여 페이지를 채운 PPT 문서였다.

이 기획서의 가장 큰 오류는 분명 한글로 작성되었는데 도저히 뭘 말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좀 더 냉정한 현실을 말하면 신입 기획자로서 취업을 원하는 지망생이 자기 기획서에 '신개념'이라는 단어를 섣불리 쓰는 것부터가 큰 잘못이다. 이런 지나친 자신감(이라고 쓰고 자만심이라 읽는다)은 평가하는 사람으로부터 큰 반감을 일으킬 소지가 매우 높다. 포트 폴리오를 평가 받을 때에는 첫인상이 매우 중요한데, 기획서 초반부터 신개념 운운하면서 시작을 해버리면 평가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지망생 주제에 어디서 신개념을 들먹여?' 하면서 기획서에서 잘못된 점을 집요하게 찾으려 들기 마련이다. 이렇게 되면 이미 80% 이상의 탈락 가능성을 떠안고 시작하는 셈이다. 기획서를 기술적으로 잘 쓰는 능력도 중요하지만 읽고 평가하는 사람이 좋은 느낌으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쓰는 요령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또 하나의 '워스트'는 정말 스펙타클한 스케일의 MMORPG 기획서였다. 얼마나 스펙타클하냐고? 아마도 이 대목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수 천명이 동시에 모여서 공성전을 벌이는 정도의 스케일을 상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기획서의 스케일로 보면 수천명의 공성전은 그냥 '미니 게임 수준'에 불과하다. 왜냐하면 이 게임은 한 명의 유저가 대규모 군대의 사령관이 되어 수 만명의 병력을 직접 콘트롤 하면서 전쟁을 벌이는 MMORPG였는데, 문제는 그 수 만명의 병사가 실제 필드에 3D 모델로 등장하도록 기획서에 명시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서너명의 유저가 PvP를 한다면 화면에는 수 십만개 이상의 3D 캐릭터가 동시에 렌더링되어 싸운다는 말이다. 어떤가? 상상이 되는가?

그렇다면 왜 이런 기획서를 실무자들이 싫어할까? 정말 특출난 스킬을 보유한 기획자가 아니라면 보통은 신입 기획자가 입사하면 3~6개월 동안 소위 말하는 '수습기간'으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이 기간은 '기획 실무'를 배우며 적응하는 기간이다. 이 말은 즉, 신입 기획자가 수습 딱지를 뗄떼까지 그 기획팀의 기존 경력자 가운데 누군가는 그 수습기획자의 '사수'가 되어 돌봐줘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면 '사수'의 입장에서는 어떤 신입을 선호할까? 당연히 빨리 수습 딱지를 떼고 한 사람의 기획팀원으로서 제 몫을 해줄 수 있는 신입을 원하기 마련이다. 그래야 자기도 편해지고 기획팀 전체가 원활하게 업무를 진행할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 신입이 위와 같은 기획서를 쓰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달가워할 리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포트 폴리오는 현실적인 기획서여야만 한다. 여기서 말하는 '현실적인 기획서'란 그 기획서를 가지고 정말 게임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그런 기획서를 쓸 줄 알아야 실무에서도 제대로 일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구현 방법에 대한 고려나 설명 없이 그저 희망사항만을 써내려간 기획서는 그냥 버려질 뿐이다.

신입 기획자로서 취업을 희망하는 지망생이라면 지금 자신이 써온 기획서를 다시 돌아보라. 문서 안에 '신개념', '초대형', '블록버스터', '획기적인', '궁극의' 와 같은 단어가 들어있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말은 게임이 완성된 이후에 광고 카피에서나 쓰는 말이다. 좋은 개발사에 채용되는 신입 기획자의 포트 폴리오는 모두 '디테일 하다'. 많은 지망생들이 위에서 언급한 대책 없는 수식어의 늪에서 허우적대는 동안 그들은 현실적이고 세밀한 기획서를 써서 현업 기획자로 가는 좁은 관문을 통과한다.

기획서를 디테일하게 쓰려면 우선 기획서가 다루는 범위를 좁게 제한해야 한다. MMORPG 세부 기획서를 쓴다면 게임의 여러 시스템 가운데 하나를 특정해서 그 시스템에 대해서만 상세하게 쓰는 것이 좋다. 역기획서를 쓸 때에도 마찬가지다. WoW의 역기획을 한답시고 열 페이지 남짓한 워드 문서로 게임 전체를 뭉뚱그리는 것보다는 인스턴스 던전 시스템에서 인스턴스 던전의 고유 아이디가 어떤식으로 생성되고 각 플레이어가 같은 인던에 입장할 때 어떤 기준으로 입장하는 던전을 분류하는지에 대해서 쓴 다섯 페이지 짜리 기획서가 더 좋은 평가를 받는다.

아직 기획서를 많이 써보지 않은 지망생이라면, 80년대 오락실 게임이나 아주 간단한 미니 게임의 기획서(또는 역기획서)부터 시도해보라. 프로그래머가 한 번 읽고 바로 코딩할 수 있는 수준으로 디테일하게 쓰려면 이런 간단한 게임이라도 만만치가 않다. 사실은 이런 작은 게임의 세부 기획서만 잘 써놓아도 취업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적어도 자신이 매우 '현실적인' 기획 개념을 갖췄다는 사실은 충분히 부각시킬 수 있을 것이다. 빨리 현업 기획자로 등극하고 싶다면 현실적이고 디테일한 기획서를 써라. 그보다 더 좋은 길은 없다.

덧글

  • 마이즈 2009/07/30 10:48 # 답글

    오늘도 잘 보고 갑니다.
    실력있고 멋진 개념 신입들이 많아지면 좋겠어요 :)
  • winbee 2009/07/30 11:41 # 답글

    간단한 아이템 기획 하나만 시켜봐도 기획자 50%는 싹수가 보입니다.

    (약물말고 딴거없겠냐? 어? 아 진짜 답답)
  • 천체관측 2009/07/30 12:11 # 답글

    오늘도 좋은 글 읽고갑니다 ~
  • 설재용 2009/08/11 01:14 # 삭제 답글

    뒤늦게 스톰님을 알게되어 글을 읽고있습니다. 지금 게임기획 기초 가이드
    파트를 읽고있는데 제가 못찾아서 그런진 몰라도 7편 다음은 어디에서
    볼수잇을까요?
  • 김영윤 2010/09/29 20:58 # 삭제

    안녕하세요 선배님 ㅋㅋㅋㅋㅋㅋㅋ
  • storm 2009/08/11 11:39 # 답글

    설재용// 7편 이후로는 연재가 중단되었습니다. 8편을 거의 써놓긴 했는데 제 가이드가 처음 쓰기 시작할때와는 달리 이제는 너무 많은 분들이 보시고 신입이 아닌 현역 개발자분들이나 교육기관에서까지 많이 보기 때문에 함부로 올리기가 좀 어렵더군요. 대신 이 블로그의 포스팅을 통해서 가이드에서 못 다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올릴 겁니다.
  • 스톰팬 2011/04/24 08:45 # 삭제 답글

    안녕하세요 스톰님의 팬입니다.

    워스트 스펙타클 부분이 다시 생각해보니 이번에 나올 커프2와 비슷한데

    여전히 워스트 한가요? 히히
  • storm 2011/04/24 12:53 #

    커프2 영상 봤지만 제가 말한 워스트 기획서의 스케일과 비교하면 1/1000 정도 밖에 안되는데요?
  • MONK 2011/06/29 16:19 # 삭제 답글

    아악.....
    고2인 제가 늦게나마 기획자로 꿈을 정했는데 할수 있는게 암것도 없네요...
    게임기획자가 되려면 게임기획을 많이 하고 게임을 많이 해봐야 하는데....환경이...크흑
  • storm 2011/06/29 16:27 #

    고2가 늦게나마 인가요? ㅎㅎ
  • 2011/12/15 20:04 # 삭제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storm 2011/12/15 23:34 #

    sstorm74@네이버닷컴으로 메일주세요
  • 대시 2012/05/14 11:47 # 삭제 답글

    멍청한 아마추어 기획자가 군대가기전에 마지막 발악으로
    게임만들고 있습니다.

    몇 일 안남았지만 스톰님 글은 볼 때 마다 도움이 됩니다.
    읽을 때 마다 제가 간과하고 있던 사실을 다시 살펴보게 되네요
  • 슭꼼 2013/04/04 19:29 # 답글

    앗 여기에 답이 있었군요. 그럼,, 중급자 가이드 역시 앞으로 영영 볼 수 없다는 예기인가요... 유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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