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 기획자가 되고싶어? (4) - 교과서와 기본기 by storm

요즘에도 이런 MMORPG가 전혀 없진 않지만, 과거의 게임들은 온라인 기반이든 패키지 기반이든 능력치(스탯)나 스킬을 한 번 설정하거나 배우고 나면 다시는 고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모두가 알고 있는 대표적인 예로 <디아블로2>를 보자. 이 게임에서 캐릭터의 능력치나 스킬은 포인트를 한 번 사용하고 나면 초기화하거나 수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같은 클래스의 캐릭터를 여러개 키우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그랬던 블리자드 역시 그 이후에 개발된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에서는 더 이상 이런 규칙을 고수하지 않았다. 능력치는 플레이어가 직접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클래스에 따라 자동으로 오르게 만들어 애초에 다시 찍을 이유가 없었고, 스킬도 같은 클래스면 다 똑같은 (물론 특정 종족만 배울 수 있는 일부 스킬이 있긴 하지만) 조건으로 배우기 때문에 초기화 할 이유가 없었다. 유일하게 플레이어가 선택해서 포인트를 배분할 수 있었던 '특성'의 경우는 모두가 알다시피 일정량의 골드만 지불하면 언제든 초기화해서 다시 찍을 수 있도록 만들었다.

스탯이든 스킬이든 한 번 찍으면 그걸로 끝이었던 <디아블로2>

그렇다면 플레이어에게 초기화 기회를 주는 것과 주지 않는 것,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떤 방법이 옳은 방식일까? 교과서적으로 설명하자면 당연히 주는 편이 훨씬 바람직하다. 특히 캐릭터 하나를 육성하는데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는 MMORPG의 경우 초기화 기회를 주지 않으면 능력치나 스킬 포인트 하나를 소비할 때마다 심한 스트레스를 받을 것이다. 만약 플레이어에게 이런 압박감이 가중된다면 일부 하드코어 유저들은 좋아할지 모르나 대부분의 유저들에겐 그렇지 않다. 그래서 게임 기획 이론서를 보면 이런 경우에는 유저에게 선택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쪽이 옳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지만 교과서가 언제나 정답은 아니다. 대부분의 경우 교과서의 내용은 단지 기본적인 가이드 라인일 뿐이며, 실전에서는 교과서에서 알려주는 기본을 얼마나 잘 응용하느냐에 따라 성패가 결정된다. 교과서를 그대로 따르기만 한다고 능사는 아니라는 얘기다. (교과서에만 충실하다고 다 해결되면 게임 기획 참 편하게 하겠다...)

<디아블로2>의 경우를 다시 살펴보면, 유저에게 능력치나 스킬을 초기화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에 유저가 이를 바꾸려면 똑같은 클래스의 캐릭터를 하나 더 만들어서 육성해야만 하는 '불편'이 있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 때문에 <디아블로2>의 게임 생명력이 길어질 수 있었다. 각자 기억을 되살려보라. '멀티샷20' 찍은 '활마(활 아마존)'로 앵벌하다가 지겨우니까 '자벨마(자벨린 아마존)'를 새로 키우고, 랜스 바바로 멥피 잡다가 PK방에서 안 먹히니까 칼 바바를 새로 키우고... 그러다 어느날 달력을 보니 한 3년이 그냥 지나가 있지 않았던가! (참고자료: TIG 카툰)
더우기 부분 유료화(라고 쓰고, 부분 무료화라고 읽는다)가 온라인 게임 상용화 방식의 기본이 된 지금에서는 수익성 측면에서 일정부분 (무료)유저를 '불편하게 만들 필요'도 존재한다. 쉽게 말해서 능력치나 스킬의 초기화 기능을 그냥 기본 서비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캐쉬 아이템이나 유료 서비스로 제공하는 것이 매우 효과적인 수익창출 전략 중 하나라는 뜻이다. (물론 정액을 꼬박 받는 결제 방식이라면 이런 서비스는 당연히 기본으로 제공되어야 한다)

즉 교과서에는 항상 유저를 배려해서 유저가 불편하지 않도록 시스템을 설계하라고 말 하더라도, 실전에서는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전략적으로 유저를 불편하게 내버려 둘 필요'가 있고 또 그 불편을 적절하게 이용하는 것이 기획자의 중요한 능력이라는 사실을 숙지하고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쯤 되면 이런 의문을 가지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아니 실전에서 교과서에 나온 대로 할 수 없다면 교과서로 공부할 의미가 없지 않나요?' 그런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답해주고 싶다. 규칙을 뛰어넘거나 변칙을 잘 구사하려면 누구보다도 규칙에 대해 통달해야 한다.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다니는 범죄자들을 보라. 그들은 누구보다도 법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가진 헛점을 파고들어 자신의 이익을 챙길 수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실전에서 교과서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면 누구보다도 교과서의 내용에 충실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기본기부터 숙달하고 나서 응용기술을 연마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라는 얘기다.

물론 시중에 나돌고 있는 게임 기획 이론서들은 대부분 교과서적인 내용만을 소개하고 있을 뿐 그것을 어떤 식으로 응용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잘 나와있지 않거나, 혹은 그 교과서의 내용이 너무 오래전 이야기이거나 혹은 (번역서의 경우) 우리 실정에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것들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이 아직 현업 경험이 없거나 매우 적은 지망생 레벨이라면 그런 교과서마저도 절대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 앞서 말 했듯이, 기본기에 충실해야만 기본을 응용하는 능력도 향상되기 때문이다.

필자는 온오프라인에 걸쳐 많은 게임 기획자 지망생들을 만나오고 있지만, 그들 가운데 상당수는 이런 교과서적인 기본기를 지나치게 무시한 채 당장 겉으로 드러낼 수 있는 스킬부터 빨리 배우려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하지만 그런식으로 배우면 결국 자신이 지망생이었을 때 욕하던 그런 허접한 기획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ps) 여담이지만 <디아블로2>가 스탯과 스킬을 초기화할 수 없었음에도 유저가 크게 반발하지 않았던 이유는 캐릭터가 매우 쉽고 빠르게 렙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소위 말하는 '카우방'의 역할이 컸다. 골수 유저들 중에는 카우방 때문에 <디아블로2>가 이상한 게임이 되었다고 비난하지만, 카우방이 없었다면 <디아블로2>가 이렇게까지 성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만약 이와 같이  빠르고 편하게 캐릭터를 고렙으로 끌어올릴 수 있는 콘텐츠가 없었다면 스탯&스킬 초기화가 불가능한 문제도 유저에게 심각한 스트레스 요인이 되었을 것이고 라이트 유저의 호응도 그만큼 감소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덧글

  • 마이즈 2008/09/29 16:51 # 삭제 답글

    [하지만 그런식으로 배우면 결국 자신이 지망생이었을 때 욕하던 그런 허접한 기획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명심하기 바란다.] 이 말이 정말 진심으로 제일 무섭네요 ㅠ.ㅠ
  • 2008/09/29 18:06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blueday28 2008/09/30 12:58 # 답글

    확실히 직구가 받쳐주지 않는 상태에서 변화구만 익히는
    것은 실제 성적과 연결되기가 힘들죠.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봐도 그렇고, 이런 게임들은 '초기화' 가
    가능하고 가능하지 않고는 차이가 큰 것 같습니다. 디아블로2의 경우는
    그 초기화의 비용이 게임 내의 머니나 캐쉬가 아닌 '캐릭터 육성에
    들어가는 길지 않은 시간' 이라 보면 될 것 같네요.

    유저가 느낄 스트레스... 확실히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네요.
    이번 편도 잘 읽고 갑니다_~_
  • 2008/10/01 12:59 # 답글 비공개

    비공개 덧글입니다.
  • 포립 2008/10/11 06:17 # 답글

    와 진짜 멋진 글이네요. 잘 읽고 갑니다.
  • blhon 2008/12/01 16:17 # 삭제 답글

    잘읽고 갑니다~^^
  • 교과서에 공감 2009/02/27 22:25 # 삭제 답글

    손자병법에 이런말이 있죠. '맛은 5가지이나, 이들이 조합하면 수많은 맛을 내고, 색은 5색이나, 이들이 또 합쳐지면 수많은 색이 만들어진다' 기본을 익혀야 응용을 잘한다는 것에 대한 비유죠. 스톰님 말씀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 버금 2012/09/14 18:25 # 답글

    스킬 재선택의 자유가 없다. 확실히 부분 유료화 게임에서 돈이 되는 것이죠!

    마비노기 게임의 스킬 '메이킹 마스터리' 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올리면 생산 성공률이 증가함

    그런데 '제련' 이라는 스킬은 승급 조건이 '생산 실패' 이것이 있어서 메이킹 마스터리를 찍으면

    제련을 올리는데 재료가 많이 소비되죠.

    멋도 모르고 메이킹을 마구 찍다가 제련을 못올려서 엄청나게 스트레스를 받은 적이 있지요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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