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리앗과 다윗의 공존 방법 by storm

바코는 어떻게 5900만원짜리 빔 프로젝터를 당당하게 내놓을 수 있는가…
초고가 포지셔닝으로 중저가 시장의 소니와 시장 분할하는 차별화 전략

▣ 이원재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 / timelast@seri.org /
<한겨레21> 2006년 9월 20일자 칼럼에서 발췌
http://www.hani.co.kr/section-021134000/2006/09/021134000200609200628025.html

이주의 용어
- 차별화 전략(differentiation strategy)
- 국지적 독점(local monopoly)
- 포지셔닝(positioning)

 
바코(Barco). 벨기에 회사 이름이다. 홈시어터 마니아, 그러니까 집에서 극장이나 콘서트장에 온 것 같은 기분으로 영화나 음악을 감상해보겠다는 꿈을 갖고 있는 독자라면 한 번쯤 들어보셨으리라. 물론 대부분 ‘아주 비싼 최고급 빔 프로젝터’로 알고 계시리라 믿는다.

실제로 알아보니, 명성 그대로였다. 영상장비 전문 쇼핑몰에 나온 프로젝터 가운데 바코 제품은 1천만원 이하 제품이 나와 있지 않았다. 가장 비싼 것은 5900만원짜리. 요즘 웬만한 가정용 프로젝터는 200만원 안쪽으로 살 수 있는데 말이다. <오른쪽 이미지는 자료 사진으로, 바코 제품과는 무관하다>


차별화로 국지적 독점 창출

웬만한 강심장이 아니고서야, 아니 강심장이라 하더라도 5900만원짜리 프로젝터를 인터넷에서 결제할 수 있을까? 빔 프로젝터 분야 세계 선두업체인 소니도 1천만원이 넘는 제품은 잘 내놓지 않는다. 특히나 인터넷 쇼핑몰에는 200만원 이상 하는 프로젝터는 잘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조그만 벨기에 회사는 뭘 믿고 이런 배짱을 부리는 것일까? 궁금증은 이어졌다. 그 초고가 제품을 잘 만들 수 있는 기업이라면 시장규모가 더 큰 저가 프로젝터 제품도 잘 만들 수 있을 텐데, 왜 그런 제품은 내놓지 않을까?

순간 내 머릿속에는 ‘포지셔닝’(positioning)‘차별화 전략’(differentiation strategy)이라는 두 개의 용어가 스쳐갔다.

포지션이란 표적 소비자 머릿속에 특정 제품이 경쟁 제품들과 대비돼 인식되는 모습이고, 포지셔닝은 특정 포지션에 자기 회사 제품을 의도적으로 집어넣는 전략적 움직임이다. 마케팅 전문가 앨 리스와 잭 트라우트가 1972년 소개한 개념이다.

차별화 전략이란, 경쟁 제품과 구별되는 특성을 강조하면서 자기 제품을 포지셔닝하는 전략이다. 차별화 전략의 목표는 시장의 특정 부문에서 국지적 독점(local monopoly)을 창출하는 것이다. 이 국지적 독점은 특정 부문 소비자에게 가격을 높이 받을 수 있는 힘을 기업에 실어주며, 결국 이익으로 연결된다.

바코가 1천만원이 훌쩍 넘는 프로젝터만 내놓은 것은, 이 회사가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초고가 포지셔닝 전략의 일환이다. 가격으로 소니와 차별화한 것이다. 이 차별화 전략은 아주 비싼 빔 프로젝터를 선호하는 부유한 홈시어터 마니아층과 초호화 프레젠테이션이 필요한 기업에서 먹혀들었다. 그 시장 부문에서 국지적 독점을 창출했고,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이익을 거둬들일 수 있었다.

소니의 연간 매출액은 6조원이고, 바코는 9천억원이다. 골리앗과 다윗 같은 이 두 기업이 오랫동안 프로젝터 시장에서 공존했던 것은, 유통망이 강한 소니는 저가 대중시장을, 바코는 고가 첨단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프로젝터 시장의 라이벌 기업이면서도 경쟁하지 않고 오히려 협력했다. 서로 부품을 공급하고 연구개발 정보를 공유했다.

협력의 정도는 매우 강해서, 바코가 소니에서 프로젝터 단순 부품 일부를 공급받을 정도였다. 바코가 내는 부품 주문을 지켜보면 바코의 연구개발 전략을 파악할 수 있게 마련이다. 마치 상대에게 패를 보여주고 고스톱을 치는 것 같았다. 두 기업이 겉보기에는 경쟁자이지만 실제로는 전혀 다른 포지션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바코의 차별화 전략이 이런 공존을 만들어냈다.

바코는 마치 소니의 연구개발 부서 같았다. 바코가 최첨단 기술을 개발해 신제품을 내놓으면서 일부 기업이나 마니아층에게 보급하면, 몇 년 뒤 소니가 비슷한 성능의 제품을 값싸게 내놓으면서 대대적으로 광고해 대중에게 확산시키는 식의 분업 구도였다. 제품이 대중화될 때쯤이면, 바코는 이미 훨씬 더 진전된 기술로 더 좋은 제품을 준비하고 있었다.

거꾸로 소니는 바코의 마케팅 부서 같았다. 소니가 저가 이미지 프로젝터를 계속 내놓으니, 바코의 고급 이미지가 한층 강조됐다. 고급 이미지 덕에 바코는 높은 가격을 매길 수 있었고, 높은 이익률을 누리면서 자원을 연구개발에 투입할 수 있었다.



바코는 R&D 부서, 소니는 마케팅 부서

실제로 바코의 연구개발 규모는 매출의 10%, 직원의 15% 정도로, 동종업계에서는 압도적으로 선두였다. 소니는 연구개발에 그다지 투자하지 않았다. 대신 바코의 기술을 따라가면서 시장이 무르익을 때쯤이면 낮은 가격과 대대적 홍보를 통해 규모를 늘리는 데 관심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소니는 몇 차례 바코의 영역을 탐냈다. 연구개발에 투자하면서 최신형의 비싼 기종을 내놓아 시장을 놀라게 했던 것이다. 그때마다 바코는 연구개발 투자를 더 늘린 뒤 얼마 뒤 훨씬 더 비싼 프로젝터를 내놓으면서 포지션을 지켰다. 소니는 중저가 대중상품이라는 포지션을 쉽게 벗어나지 못했다.

차별화는 경쟁력을 가져온다. 그런데 차별화 전략을 통해 한번 소비자 머릿속에 박힌 포지션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바코는 최고의 기술력을 가졌으면서도, 소니가 가진 거대한 대중 시장에 도전해 몸집을 키우겠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포지션을 점점 더 강화하며 ‘작지만 강한 혁신가’의 이미지를 고집했다. 이게 그 누구도 섣불리 살 것 같지 않은, 5900만원짜리 프로젝터가 인터넷 쇼핑몰에 걸려 있는 이유다.


덧글

  • Realkai 2008/02/19 02:22 # 답글

    포지셔닝이란게 게임업계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는 지금의 게임 순위를 보면 알 수 있죠.

    부동의 1,2,3위 게임들은 각자 다른 장르로 서로의 영역에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상당한 이익을 내고 있는 게임들이며 다른 게임들이 이겨보려고 그렇게 애써도 쉽게 안되고 있죠. 그 외에도 프리스타일, DJ맥스, 건담캡슐파이터등 이러한 예는 많다고 봅니다.

    정면돌파가 옳은 경우도 있지만 측면공략이 옳은 경우도 있으니까요. :)
댓글 입력 영역



통계 위젯 (화이트)

418
163
5303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