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설] MMORPG, 힐러는 없어져야 한다? by storm

내가 자주 가는 디스이즈 게임 닷컴(www.thisisgame.com) 에서 얼마전 MMORPG에서 힐러는 없어져야 한다는 이색적인 주장이 게이머 발언대에 올라와 큰 화제가 된 일이 있다. 뭐 사실 원래는 와우 메카나 인벤 같은 WoW 팬사이트 커뮤니티에서 오래전부터 잊을만 하면 논란이 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원문은 아래 링크를 클릭]
http://www.thisisgame.com/board/view.php?id=123470&category=203

원문이 꽤 길기 때문에 귀차니즘에 빠진 분들을 위해 대강 글 내용을 요약 하자면..

WoW 전투의 세 가지 큰 축은 탱킹/딜링/힐링 이며 이 세 가지는 어그로 시스템에 의해 연결되어 있다. 따라서 힐은 필수 요소이다. 힐러는 아군의 생명을 연장시켜주어 전투 지속시간을 결정한다

힐러는 보스 몬스터의 얼굴도 모른채 그저 아군의 HP 게이지를 보며 빈칸 채우기(비어있는 HP칸을 힐로 다시 채우기)나 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힐러는 (다른 클래스에 비해서) 재미없다 → 힐러의 수가 부족하다 → 힐러가 없어서 던전에 못 가는 경우가 발생한다. → 컨텐츠를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유저들이 게임을 접는다 → 힐러의 수도 감소한다 → 악순환의 무한 루프

힐러를 없애는 대신에 도입할만한 대안 몇 가지


사실 WoW의 힐러에 대한 다양한 견해들은 오래전부터 있어왔지만 이 글이 큰 논란이 된 이유는 다른 경우와는 달리 극단적으로 힐러를 없애야 한다는 주장을 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힐러는 재미없고 문제가 많은 직업이므로 MMORPG에서 사라져야 할 존재일까?


좀 특이해 보일지 몰라도 나는 MMORPG에서 힐러를 매우 선호한다. 물론 예전 PC패키지 RPG를 즐길 때에도 주로 힐러를 좋아하는 편이었다. <발더스 게이트>나 <아이스윈드 데일> 그리고 <던전 & 드래곤즈 온라인>에서도 항상 주인공 캐릭터는 팔라딘이나 클레릭을 주로 했고 WoW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WoW 클로즈 베타 때부터 주 캐릭터가 성기사였고 신섭이 생겼을 때 재미삼아 키웠던 캐릭터도 사제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룩으로 찍은 스샷. 성기사는 역시 심판셋을 입은 모습이 가장 멋지다. (어깨는 안퀴셋)


딱 잘라서 말하면 나는 힐러가 재미 없는 직업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레이드를 안해봐서 그런게 아니냐고? 힐러의 인내력을 시험하는(!) 극악의 레이드는 이미 지겹도록 했었다. WoW 레이드 초창기인 2005년 4~5월에 나는 '세계 최초 라그나로스 킬'을 놓고 경합을 벌였던 한 공대에서 레이드를 시작했다. 그 뒤로 검은날개 둥지, 안퀴라즈, 낙스라마스 등 확장팩 이전의 레이드는 모두 다 경험했고 나름데로 서버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수준의 공대에서 계속 활동했었다. 비록 확장팩 <불타는 성전>에서는 70렙만 찍고 거의 손을 놓고 있지만 말이다.

나는 레이드에서 힐러로 플레이하는 것이 무척 재미있었다. 사제보다 더 많은 치유량을 기록한다거나 서버 최고의 마나량을 보유한 성기사가 된다거나 하는 개인적인 목표가 있어서 그런 것도 있었지만, 힐러를 하면 시야가 넓어져서 상황을 전체적으로 판단하고 조율할 수 있다는 점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더우기 성기사는 무적 기술이 있어서 전멸 당할 위기에서도 무적을 이용해 최후까지 살아남아 탱커를 살리고 아주 적은 수의 생존자와 함께 가까스로 네임드 몬스터를 쓰러뜨릴 때의 그 쾌감은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다.

나는 사제들이 안먹는 천템까지 먹어가며 최고의 힐러가 되고 싶었다. 중앙 맨 아래쪽 캐릭이 로브입은 내 성기사 (2006년 9월 낙스라마스 역병술사 노스와의 전투 당시)


WoW를 해 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사실이지만, 성기사 역시 레이드를 가면 보통 적을 공격할 기회나 여유는 거의 없다. 사제와 마찬가지로 거의 힐에 전념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판금 사제'란 말도 있지 않았던가. 하지만 나는 아군을 살려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기여한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재미있었고 보람을 느꼈다.

물론 나도 가끔은 힐러의 역할이라는 게 '빈칸 채우기' 같이 덧없는 게 아닌가 하는 회의감이 들 때도 있었다. 2~3개월 마다 한 번씩 찾아오는 레이드 불감증, 혹은 레이드 권태감을 느낄 때 특히 그랬다. 나는 그럴때마다 과감히 레이드를 쉬었다. 그리고는 새로 생긴 서버에 가서 성기사가 아닌 다른 클래스를 1레벨부터 다시 키우며 새로운 활력을 찾으려 했었다.

2005년 가을쯤이었나?
얼라-호드의 인구 불균형 때문에 4~5개 서버가 통합되어 새로 오픈한 둠해머 서버에서 나는 언데드 전사를 키웠다. 당시에 둠해머 서버에서는 호드 진영에서 1레벨부터 60레벨까지 키우면 무료 이용권을 주는 이벤트가 있었기 때문에 호드에서 1레벨부터 새로 키우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래서 최저렙 인던인 <성난불길 협곡> <통곡의 동굴> <붉은 십자군 수도원> <울다만> 등 여러 저렙용 인던에서 탱커를 하며 힐러를 할 때와는 다른 색다른 재미를 느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전사를 키우면서 힐러가 정말 재미있고 보람있는 역할을 하는 직업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던 탱커를 하면서 나는 HP가 거의 바닥이 보이더라도 힐러가 나를 치유할 것이라 믿고 끝까지 모든 적들로부터 아군을 보호하지 않으면 안됐다. 힐러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지 않고서는 제대로 탱킹을 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냥 힐러만 할 때는 느낄 수 없었던 사실들도 알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수준 높은 힐러와 그렇지 못한 힐러의 차이가 디에서 오는지, 그리고 힐러가 어떻게 해줘야 탱커가 더 수월하게 어그로를 잡을 수 있는지 등을 훨씬 더 뼈저리게 체감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일반적으로는 뒤에서 힐이나 버프를 주는 것보다 앞에 나서서 직접 적을 공격하는 것이 더 재미있게 느껴진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직접 공격을 하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보다  힐러와 같이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행동에서 재미를 느끼는 것이 훨씬 어렵다. 하지만 힐러의 참맛을 느끼게 된다면 그것이 얼마나 재미있고 또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직업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나는 '힐러는 없어져야 한다'라는 글을 쓴 사람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스스로 받아들이기 나름이 아닌가 생각 한다. 힐을 하는 행위를 '빈칸 채우기'로만 본다면 회의감이 드는 것은 당연하다. 나 역시 그랬으니까... 하지만 만약 축구에서 골키퍼가 재미없다고 골키퍼를 없애자고 한다거나 야구에서 포수가 재미없으니까 없애버리자고 한다면 어떨까? 안된다. 누군가는 그 역할을 해야 한다. 설사 다른 사람이 그것을 궂은 일로 보거나 재미없는 일이라고 해도 말이다. 자기 스스로가 재미와 보람을 찾으면 그만이 아닐까?

어렸을 때부터 골키퍼로 시작해서 결국 골키퍼만 하다가 은퇴하는 축구 선수에게 왜 골키퍼를 했느냐고 물어보면 대답은 대개 이렇다 '나는 골키퍼가 재미있고 내가 골키퍼인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 포수를 하는 야구 선수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비슷하다. '포수는 팀의 어머니다. 나는 단지 투수가 던지는 공을 받아주는 역할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팀을 추스리며 분위기를 주도한다'

힐러를 좋아하는 내 대답도 비슷하다. 그리고 거기에 한 마디 더 덧붙이고 싶다

"누구나 힐러가 될 수 있었다면 나는 힐러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덧글

  • 팬텀 2007/09/25 21:33 # 답글

    밸리타고 왔습니다 'ㅁ'//
    정말 신선한 발상이네요 트랙백 신고합니다
  • 카잔스카이 2007/09/26 12:43 # 답글

    힐러가 재미없어서 안한다라기보다는.. 게임의 벨런스에 영향을 주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힐러덕분에 무한사냥이 가능해지고 그걸 악용해서 투계정 투컴 돌려가며 주 캐릭이 아닌 보조캐릭으로 놓는 사람들이 많아지기 때문이죠. 솔직히 MMORPG에서 힐러란 명색에 맞게 제대로 돌아가는 겜이 얼마나 될까요. 리니지1은 쫄프로그램으로 법사 뒤에 데리고 다니며 오만탑같은데서 무한사냥을 하고, 라그나로크는 프리스트의 어마어마한 힐량덕분에 사냥터 자체가 프리+아숨아니면 사냥이 힘들정도로 난이도가 조정됐으며, 리니지2같은 경우는 투계정 쓰리계정등등 멀티계정 돌려가며 사냥터에서 플핏&실엘들 데리고 다닙니다. WOW는 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힐러라는 클래스 자체가 MMORPG특성상 벨런스에 맞게 돌아가기는 매우 힘들 듯 싶습니다.
  • Sakiel 2007/09/26 13:12 # 답글

    밸리타고 왔습니다.

    저도 온라인게임을 하게 되면 힐러를 즐겨 하는 편입니다.

    내가 없으면 파티가 안 돌아가!라던가 인기가 많아!라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전 체력창 보면서 열심히 힐 주는거 자체가 마음에 들더라구요. 물론 크게 생각 안 해도 되니 편하기도 하고[먼산]

    애시당초 MMORPG도 Role Play라는 게임의 틀을 지향하고 있으니, 힐러가 없어진다는건 어불성설에 가깝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플레이어들 생각은 다를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게임의 본질이니까요. 전사가 막고, 힐러가 힐을 하고, 마법사가 마법을 써서 보조합니다. 그게 역할 분담이라는 거니까요. 오히려 전 이런 구성 없이도 사냥할수 있는 게임이 싫기도 하구요.
  • 지나가던무명 2008/01/29 19:39 # 삭제 답글

    저도 힐 짤짤이 하는 게 (그냥 자기만족일 지도 모르지만) 법사 뛸 때 보다 더 만족스러움 ㅠㅜ
  • 얼음꽃 2008/01/31 06:02 # 삭제 답글

    농구게임에서 포인트가드는 패스만 한다고 재미없을거란 생각도 있죠..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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