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롤플레잉 게임은 연극이다 by 광사마스톰

이 글은 2005년 10월 1일 웹진 <지데일리>에 기고했던 칼럼을 수정 보완한 것입니다.



롤플레잉 게임은 연극이다.


롤플레잉의 시초
롤플레잉의 역사는 컴퓨터가 아닌 말판(보드)와 주사위, 그리고 카드를 놓고 펼치는 보드 게임부터 시작됐다. 흔히 말하는 TRPG가 바로 이것으로 여기서 ‘T’는 ‘Table-talk’, 즉 탁자에 둘러 앉아 즐기는 롤플레잉 게임이란 뜻이다.

여기서 문제는 ‘롤플레잉’에 대한 우리말 풀이이다. 국내에 출간된 게임 이론서들은 거의 모두 롤플레잉을 ‘역할 수행’으로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롤플레잉이 과연 그런 뜻일까?

‘롤플레잉’이라는 용어는 1920년 J.L 모레노가 정신병 집단치료법의 하나로 <사이코 드라마>를 위해 창안한 연극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이코 드라마(Psycho Drama)란 우울증이나 심한 컴플렉스 증상과 같은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들로 하여금 희곡이나 연극에서 자신과 유사한 정신적인 고뇌를 갖고 있는 인물의 배역을 맡아 연기하면서 감정몰입에 이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심리적 안정을 되찾고자 했던 치료법이다.

게임에서 롤플레잉의 시초는 1974년 TSR Hobbles사의 개리 자이각스(Gary Gygax)가 개발한 <던전 앤 드래곤즈>로 흔히 D&D라 불리우는 TRPG이다. D&D에서 롤플레잉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이 ‘J.L 모레스의 연극’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지는 좀 더 조사가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연극의 출연진들이 ‘배역을 연기하듯이’ TRPG의 플레이어들도 자신이 맡은 배역(인물)을 연기했다는 사실이다.

TRPG의 탄생 배경에는 그보다 앞서 1880년대부터 제품화 되었던 미국의 전쟁 게임(War game)에 있다. 이 전쟁 게임은 과거의 유명한 실제 전쟁을 말판과 나무토막으로 만든 병사들, 그리고 복잡한 규칙(룰북)을 가지고 즐겼던 게임으로 쉽게 말하면 스토리가 가미된 장기와 흡사한 형태였다. 이것이 1950년대 이후에 현대적 스타일의 보드 게임으로 발전한 것이다.

전쟁 게임이 실제 전쟁을 게임으로 재연한 것이라면 TRPG는 인기 있는 판타지 소설을 게임으로 재연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소설에 등장했던 인물들을 하나씩 맡아서 그 인물의 성격과 특징에 맞는 연기를 해가며 게임을 즐겼다. 소설을 재연한 것이기 때문에 TRPG에서는 승부를 따지는 일이 없었다. 플레이어들 사이에 경쟁이란 존재하지 않았고 게임의 목적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소설을 ‘연극’으로 풀어나가는 것이지 지금의 롤플레잉처럼 ‘고속성장’이나 ‘절대적인 부’, ‘상대의 제압’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처음 D&D를 제품화 하기 위해 개발자가 보드게임 제조업체를 찾아갔을 때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다. ‘승패’가 없는 게임을 누가 사느냐는 것이 그 이유였다)

따라서 엄격하게 따지면 Role Playing은 ‘배역 연기’로 번역되어야 옳다. 배역이나 역할이 서로 유의어이기 때문에 ‘역할 연기’나 '역할 놀이'도 큰 무리는 없다. 그러나 요즘 게임에서는 '역할'이라는 단어가 '배역'의 뜻보다는 '직업구분에 따른 임무' 정도로 여겨지는 경향이 짙다. 이를테면 롤플레잉 게임은 전사가 맷집을 대고 힐러는 힐을 하는 식의 직업별 '역할을 수행하는 게임'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롤플레잉 게임은 기본적으로 직업 구분이 있고(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클래스 구분이라고 해야 더 정확한 표현이다) 직업에 따라 주어진 역할을 잘 수행하는 것이 게임 플레이의 핵심요소에 포함되는 것은 사실이다. 몬스터를 사냥하고 주어진 퀘스트를 수행하는 데는 물론 '역할을 잘 수행하는 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롤플레잉의 근본일까? 아니다. 나는 게임에 제공하는 가상 세계에서 내가 선택한 아바타를 매개체로 살아가면서 가상의 삶(배역)을 연기하는 것이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리지 않을까? 적어도 역할수행보다는 배역연기가 더 넓은 스펙트럼을 포괄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롤플레잉 본질의 퇴색
하지만 롤플레잉의 뜻이 배역연기냐 역할수행이냐를 따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원론적인 이야기에 불과하다. 최근의 RPG는 롤플레잉이라는 이름만 유효할 뿐 과거의 본질은 상당히 퇴색되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롤플레잉 게임들이 갖는 초점은 ‘몇 레벨까지 얼마나 빨리 키우느냐’ ‘얼마나 강력한 아이템을 차지하느냐’ ‘얼마나 많은 상대를 쓰러뜨리느냐’에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그래서 일부에서는 지금의 롤플레잉을 Role Playing이 아닌 Roll Playing이라고 비꼬아서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서의 ‘Roll’이란 ‘주사위를 굴린다’는 뜻으로, ‘희박한 운에 의한 아이템 획득을 좇는 행태’ ‘좀 더 높은 수치를 얻기 위한 집착’ 등과 같은 현대 RPG의 왜곡된 단면을 빗댄 표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가 있다. 일단 롤플레잉이 가진 본질을 연구하고 실제 개발되는 게임에서 그 본질을 살려내자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롤플레잉 게임에서 게임 플레이의 중심이 되는 것은 ‘맡은 배역(역할)을 연기하는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와 같은 외국 게임 중에는 일부 서버를 RP(Role Playing) 서버라고 해서 플레이하는 캐릭터의 종족, 직업 등에 맞게 채팅하는 말투나 행동을 그에 어울리게 연기해야만 하는 규칙을 지정한 경우도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에는 RP서버가 없다) 예를 들자면 평소에 “퀘스트 같이 할 파티 구합니다” 라고 해야할 말을 “자, 나와 함께 저 악의 무리들을 몰아낼 용감한 자 있는가?”같은 표현을 써야하는 식이다.

하지만 RP서버는 단지 현대의 게임으로 과거의 TRPG를 ‘흉내내는’ 장치일 뿐, RP서버가 롤플레잉 본연의 의미를 제대로 갖추는 근본적인 해결책이라고 보긴 힘들다. 중요한 것은 플레이어들이 ‘연극’의 겉모습을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그 본질을 즐길 수 있도록, 즉 플레이어들이 자신의 배역(캐릭터)을 마음껏 연기(플레이)할 수 있도록 게임에서 적절한 환경을 조성해주어야 한다는 점이다.



롤플레잉은 연극이다
필자가 여러차례 롤플레잉이라는 용어의 시초와 게임 플레이의 본질이 연극에 있음을 밝혔다. 그러나 지금의 롤플레잉 게임, 특히 온라인 상에서 수천 수만의 사람과 함께 플레이하는 MMORPG가 연극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의문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 현대의 롤플레잉 게임을 즐기면서 ‘연극’을 연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굳이 연극이라는 용어에 이질감을 느낀다면 '아바타를 통한 가상의 인생'이라고 표현해도 좋을 것이다. 이제 조금 받아들일 마음이 생겼는가? 그러나 사실 따지고 보면 단어의 느낌에서 오는 차이일 뿐 '가상의 인생'이 결국 '연극'인 셈이다. 우리가 있지도 않은 일을 꾸며서 말하거나 행동할 때 '너 지금 연극하냐?'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가!

연극의 3요소는 희곡, 배우, 관객이다. 그래서 좋은 ‘연극’이 만들어지려면 훌륭한 시나리오(희곡), 그리고 플레이어(배우)가 필요하다. 물론 관객도 필요하지만 온라인 네트워크에서 펼쳐지는 지금의 MMORPG에서는 플레이어 각자가 자기 캐릭터에 대해서는 연기자가 되고 다른 캐릭터를 볼때에는 관객이 된다. 플레이어 한사람이 배우와 관객을 겸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한 포인트이다. 그래서 개발자는 플레이어가 연기자일 때나 관객일 때나 모두 만족할 수 있는 무대를 만들어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의 롤플레잉이 왜곡된 모습을 갖게 된 이유 중에는 제대로 된 시나리오와 무대가 없었던 탓이 크다. 물론 ‘공식 웹사이트에 게재된 배경 이야기나 세계관 설정’은 모든 게임이 다 그럴듯하게 짜여져 있다. 하지만 실상은 어떠한가? 대부분의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캐릭터를 만들어서 게임속에 들어서자마자 수많은 몬스터들이 깔려있는 필드에 무책임하게 내버려진다. 개발자가 의도했던(최소한 보도자료로 내세웠던) ‘새로운 세계’는 온데간데 없고 ‘넘어서야 할 레벨’과 ‘죽어야할 몬스터’, 그리고 ‘수치놀이(Roll Playing)’에 필요한 아이템’만이 있을 뿐이다.

물론 이와 같은 ‘수치놀이’를 즐기는 사람들도 엄연히 존재하며 수치놀이 역시 치밀하게 짜여져 재미를 주는 요소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롤플레잉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배역연기를 위해) 몰입할만한 요소를 제대로 갖춘 가상의 세계’이어야 하며 이것이 완벽할 수록 플레이어 개개인의 수치놀이도 의미가 부여되고 재미가 더해지는 것이다.

그래도 롤플레잉 게임이 연극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다고? 그렇다면 당신은 왜 레벨업을 하고 왜 더 좋은 장비를 찾아 나서는가? 그 연극(가상세계)의 주인공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었나? 당신이 진정으로 열광해 온 것이 무엇인지 스스로 고민해 볼 일이다.


이 글에 동의하는 분들께 도움이 될만한 서적들
<Writer's Journey> 크리스토퍼 보글러 지음 / 함춘성 옮김 : 도서출판 無憂樹
<디지털 게임 스토리텔링> 한혜원  : 살림출판사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 이인화 : 살림출판사

덧글

댓글 입력 영역



통계 위젯 (화이트)

3837
178
503152